[곡성] '외지인'에 관한 다양한 상징과 해석
곡성에서 외지인은 영화의 중심인물이며, 그 안에는 여러가지 캐릭터들이 차용된 모습을 보인다. 이렇게 섞인 각 캐릭터들을 살펴보면 곡성에서 보여주는 외지인의 모습과 감독이 담고자한 주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
첫번째, 텐구(天狗).
외지인의 외견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캐릭터는 텐구이다. 텐구란 일본의 요괴로, 그 기원은 중국에 있다. 한자(하늘천, 개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원래는 개의 형상을 하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요괴이다.
그러나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하늘을 나는 것 외에 대부분의 성질이나 발생배경 등은 새롭게 형성되어 별개의 요괴가 되었다.
일단 겉모습은 붉은 얼굴과 큰 코가 특징이다. 얼굴이 붉고, 코가 크고, 날개가 있어 하늘을 날 수 있다. 외향은 전체적으로 수도자 또는 중의 모습을 띄고 있다. 곡성의 외지인이 악귀의 모습을 보일때와 유사하다.
포지션은 일본 불교에서의 "악마"로 보면된다. 불법을 수련하여 법력은 높으나 그 성질이 교만하고 사악하면 성불하지 못하면 텐구도로 떨어져 텐구가 된다. 긴 코는 교만한 성품을 상징한다. 텐구의 종류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다이(大)텐구와 카라스(까마귀)텐구가 있다. 다이텐구는 텐구 중에 가장 신통력이 강한 텐구로 천재지변이나 전쟁을 일으킬 수 있고, 부채질 한번으로 폭풍을 불러일으킨다. 카라스텐구는 말그대로 까마귀텐구로, 얼굴에 부리가 있어 새의 형상을 하고 있으며 사람을 홀리거나 스님을 타락시킨다. 다이텐구는 종종 카라스텐구를 부리는 것으로 그려진다.아마도 외지인과 까마귀의 관계는 여기서 빌어오지 않았을까.
텐구는 그 기원이나 성립배경이 다양하기 때문에 성질이나 외형도 꼭 정해진 것은 없다. 또한, 곡성에 차용된 부분은 대부분 외형적인 부분이므로 딱히 깊게 알아볼 필요는 없어보인다. 다만 곡성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점은, 텐구가 산신(山神)이라는 점이다. 이 부분은 외지인이 산속에서 거처를 두고 활동하는 것에서 유사한 점을 보이며, 무명과의 관계에서도 의미가 있다. (차후 무명에 관한 글에서 다룰 예정)
두번째, 바알(baal).
외지인에 차용된 두번째 캐릭터는 기독교에 등장하는 악마,'바알'이다. 바알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도착한 약속의 땅, '가나안'의 토착민들이 숭배하던 신으로, 풍요와 다산의 신이다. 그지역으로 이주한 이스라엘 민족의 "야훼"신앙과 경쟁관계였으며, 구약성서에서도 이런 부분이 여러차례 드러난다.
주로 숫소,황소로 상징되며, 구약성서에서 황금숫송아지 우상 숭배에 관한 갈등은 자주 등장하는 부분. 곡성에서도 숫소는 악귀의 상징을 나타낸다. (효진이 방에 차려진 제사상에는 돼지머리 대신에 숫소의 머리가 올려져 있다.)
외지인의 방에서 발견된 춘화와 효진이의 일기장의 낙서, 여성 피해자의 강간 등 성적인 부분도 바알의 상징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바알에게 바쳐지던 독특한 제사풍습과 연관이 있다. 하늘을 상징하는 바알에게는 땅의 곡식과 사랑을 상징하는 여신이자 배우자인 아스다롯이 있다. 가나안 사람들은 이 부부의 부부생활이 풍성해야 풍년이 든다고 생각했고, 이들을 자극하기 위해 집단난교를 벌이는 제사풍습이 있었다. 이런 풍습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스며들어 마찰을 빚는 내용이 구약성서에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바알은 기독교의 '7가지 죄악'중에 식탐을 상징한다.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어치우는 효진의 모습은 악귀에게 점령되었음을 상징한다.
바알의 다른 이름 중에는 벨제붑이라는 이름도 있는데, 벨제붑은 곤충을 부리는 능력이 있다. 서구권 서사물에서 곤충떼는 악마의 능력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으며, 일광의 차에 나방떼가 날아드는 장면은 악귀가 "내가 살아났으니, 돌아오라"는 메세지로 해석된다.
그 외에 지속해서 등장하는 까마귀, 검은개, 흑염소, 검은닭 등 모든 검은 동물은 악마의 하수인, 또는 악마의 상징을 나타낸다.
셋째, 바로.. 예수.
사실 곡성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과 모든 상징을 통틀어서 이 부분이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영화시작과 함께 보여주는 성경구절은 누가복음의 일부이다,
그들은 놀라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하였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너희는 당황하느냐? 어찌하여 마음에 의심을 품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너희가 보다시피, 나는 살과 뼈가 있다.
누가복음 24: 37~39
이는 예수가 부활후 자신을 따르던 이들 앞에 나타난 장면으로, 사람들은 그가 귀신인지 사람인지 혼란스러워하며 두려움에 떤다. 그것을 본 예수는 스스로의 손과 발의 성흔을 보여줌으로써 이들에게 본인의 존재를 확인시킨다. 이것은 곡성의 마지막 부분, 동굴씬에서 그대로 오마주된다.
영화 전반에 걸쳐 외지인의 존재가 "귀신인지, 사람인지"에 대한 의문은 수없이 등장하고, 등장인물들의 대화에서도 반복적으로 묻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 대답은 한번도 속시원히 말로 풀어지지 않고, 오로지 장면으로만 묘사된다.
영화에는 이 외지인의 존재가 무엇인지 나타내기 위한 장면이 여러차례 등장하는데 재미있는 점은 그가 "분명히 귀신"이면서, "분명히 사람"이라는 점이다. 새빨간 얼굴에 새빨간 눈으로 변해 얼굴을 파묻고 발톱과 이빨로 고라니의 생살을 뜯어먹는 장면에서 외지인은, 도저히 사람일 수 없는 "분명히 귀신"이다.
반면에 종구와 친구들에게 쫒겨 산을 도망다니고, 절벽에 매달려있다가 떨어져서 손으로 입을 막고 우는 장면은 "분명한 사람"이다. 따라서 관객들은 그의 존재에 대해 혼란을 느끼게되는 것이다. "분명히 귀신"이면서, "분명히 사람"인 존재...
이런 개념은 의외로 기독교인들에게는 익숙한데, 그것이 바로 "예수"이다. 기독교에서 예수는 '완전한 신'이자, '완전한 인간'이다. 여기서 '완전한'이라는 것은 퍼펙트하다는 것이 아닌, '100%'를 의미한다.
어떤 이는 예수가 반인반신 혹은 육체는 거짓이고 실체는 신인 존재, 혹은 인간으로 태어나 부활하여 신이 된 존재로 오해하나, 예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100% 신이며, 동시에 분명한 육체를 가진 100%인간이다. 기독교에서 이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간성" 두가지 중에 한가지라도 부정하게 되면 이단이 된다.(이단 논쟁은 꼭 밥그릇 싸움의 문제는 아니다)
이런 예수의 속성을 그대로 가진 것이 곡성에서의 외지인이며, 영화는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아주 '지독히 귀신같은 모습'과 '지독히 인간적인 모습'을 일부러 둘 다 보여준다. 특히 절벽에서 떨어져서 입을 막고 우는 장면은 마음이 아플정도로 '사람'스러운 장면이다. 이런 의도가 없었다면 굳이 그렇게 안쓰럽게 울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이다.
영화 전반에 걸쳐 외지인이 겪게되는 일대기는 예수의 일대기와 매우 흡사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에게 의심받다가.. 핍박받고.. 결국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부활. 가톨릭 부제와의 동굴씬은 부활 후의 예수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했다. 심지어 손의 성흔까지... 그리고 그 성흔을 본 가톨릭 부제의 마지막 대사는 바로,
"오, 주여"
이것은 마치 죽음 앞에 하나님을 찾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고, 눈앞의 대상에게 하는 신앙고백으로 보이기도 한다. 다분히 의도된 중의적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이야기를 만들다 보니 '곡성'이 예루살렘일 수 있겠구나 싶었다. 예수님이 당시에는 이런 존재였을 수도 있고.
신약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의문을 던지고 싶었다"
-나홍진
일대기 중에 재미있는 부분은 바로 중구와 친구들에게 쫒기는 장면이다. 외지인은 생고라니를 뜯어먹던 무시무시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아무 능력없이 도망치기만 한다. 이상한 점이다.
가롯유다가 예수를 팔았을 때, 유다는 로마군 앞에서 예수가 메시아적 권능을 발휘해 그 상황을 타개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하늘에서 천군천사가 내려와 무엄한 로마군을 살육하는 장면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예수는 아무 능력도 보이지 않은 채, 잡혀가 고난을 당했고 결국 죽임을 당한다. 이런 플롯에서 외지인에 모습은 예수와 유사성을 보인다.
또한, 영화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낚시와 물고기는 예수에 관한 상징물이다. 이 표시는 초기 기독교인들이 사용하던 것으로, 안에 쓰여진 글자는 ΙΧΘΥΣ (익투스, 헬라어로 물고기)이다. 이는 어떤 문장의 머릿글자를 따서 만든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뜻이다.
물고기는 예수와 관련하여 신약성서에 여러번 등장한다.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는 어부였으며, 예수는 이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막 1:17)"라고 말한다. 또한 예수의 말씀대로 그물을 내리자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를 낚은 일(요한 6:1-13),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과 함께 고기를 구워먹은 일(요한 21:1-13), 돈이 없어 예수님의 일행이 곤궁에 빠졌을 때 시몬 베드로가 물고기의 입에서 금화를 찾아낸 이야기(마17:24-27) 등의 일화가 있다.
영화에서 외지인은 낚시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는 그가 마을사람들의 영혼을 낚고 있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낚시의 대상인 물고기는 그들의 영혼이다. 이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사람낚는 어부가 되라 말했을 때에 그 낚는 대상이 그들의 영혼이 됨과 동일하다. 그리고 악귀에게 사로잡힌 효진이 게걸스럽게 집어먹는 것 또한 생선이다. 즉, 외지인(악귀)가 취하는(낚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영혼임을 암시한다. 이는 일광이 미끼의 비유를 할 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누가복음 24:41~43
그리고 일광.
일광은 감독이 이미 밝혔듯이 외지인과 처음부터 한패다. 단지 한패가 아니고, 나는 그 외지인(악귀)가 곧 일광이 무당으로써 모시는 '신'이라고 본다. 이것은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면 닿게되는 당연한 추론이지만, 외지인이 "육체를 가진" 존재라는 점이 이런 추론을 방해한다. 그러나 그는 "완전한 귀신"인 존재이므로 일광과의 관계는 주종관계로 보는 것이 옳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일광이 신내림을 받은 것은 아마도 일본이며, 악귀는 그와 함께 바다를 건너 왔을것이다. 뭐 일본의 악귀를 모시게 되었으니 신내림 장소가 일본인 것은 당연할 것이고, 훈도시를 착용한 모습이라던지 도로에서 왼쪽으로 주행하는 모습이 그가 일본에서 오래 생활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보면 악귀를 모셔온 일광은 어찌보면 곡성이 그지경이 된 원흉이다.
무명과 일광이 만나는 씬에서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느끼는데,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외지인의 신변에 문제가 생긴 것을 안 일광은 효진의 동태를 살피러 집에 찾아왔다가 효진을 지키는 무명을 만나 기가 역류하고 도망친다. 본인의 거처로 간 일광은 초에 불을 붙이고 기도하려하나 불이 붙지 않고, 무명은 죽은 까마귀 시체(악귀의 죽음을 상징)를 그에게 보내 경고한다. 주인을 잃고 겁을 집어 먹은채 서울로 도망가려하는 일광에게 악귀는 나방떼를 보내 본인이 부활했음을 알리고, 일광은 주인에게 돌아가 본인의 역할(사진을 찍어 피해자의 영혼을 거둠)을 마저 완수한다.
외지인의 의미
그렇다면 왜 감독은 신(예수)와 악마(바알)를 하나의 대상에 투영한 것일까? 감독은 인터뷰에서 이와 같은 말을 했다.
"영화의 시작은 피해자에 대한 고민부터였다. '어떻게' 피해를 입었는지에 대한 답은 있는데 '왜' 피해를 입었는지에 대한 답은 없더라. 왜 이 사람이어야만 했는지, 왜 이 피해를 입어야만 했는지. 현실에서는 '어떻게'라는 답에서 충족하는데 '왜'에 대한 질문은 현실 범주에서 생각할 부분이 아닌 것 같았다. 그 순간 공포가 찾아왔다. 이 영화에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가 뭘까. 무서운 생각이 든 거다. 인간 존재를 생각하니 가장 밀접한 신이 생각이 났다. 일단 들었던 생각은 이거다. 이 모든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신이 있기는 한 것인가. 실재는 하느냐. 선하긴 한거냐. 바라만 보는 거냐. 도대체 (이 곳은) 왜 이런가. '곡성'은 그런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까운 가족이 죽었다. 죽지 않아야 할 상황이었는데 죽었다. 당시 '황해'가 끝나고 난 뒤였는데 오만가지 생각이 들더라.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너무 선한 사람이었는데
그렇게 세상을 떠났으니깐. 장례식에서 예배를 드리고 스스로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유를 찾기 시작하면서 확장하고 확장했다. 그렇게 찾은 이유를, 시선을 부감으로 와이드해서 봤더니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즉, 감독은 신과 악마를 하나의 대상에 투영함으로서, "신이란 존재하는가, 신이 있다면 선인가, 악인가, 아니면 둘다 아닌가"라는 생각, 좀더 구체적으로 따지자면 "과연 신이 인간의 영혼을 거두어가는 것이 구원이 맞는가"하는 의문을 던지고 있다.
감상
기독교인에게 이영화는 분명 불편할 수 있으나, 나는 이 영화가 "반기독교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신에 대한 근원적 의문을 담고 있을뿐, 사탄 숭배따위는 아니니까.
또한 이 의문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겪는 의문이다, 감독이 겪었듯 의지하던 가족의 죽음 혹은 인생의 끔찍한 절망 앞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께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라고 수없이 질문한다. 예수조차 예외는 아니었다. 그도 분명 '완전히 인간'이었으니까.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태복음 27:46
기독교집안에서 나고자란 사람들은 머리가 굵어질수록 어려서부터 주입된 신앙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게되는 과정을 반드시 겪게 되는데 그때에 많은 이가 이와 같이 신의 존재에 대한 고민을 거듭한다. 그런 경험을 가진 이라면 감독의 고뇌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로봐서는 고뇌의 결과로 감독의 맘은 교회를 떠난듯 싶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불신자의 고뇌'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런 고뇌가 영상물로 만들어졌을 때의 거북스러움은 기독교인으로 어쩔 수 없긴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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